📑 목차
재검진 결과를 듣는 날, 결과보다 내 반응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 기록. 검사 결과를 판단이 아닌 정보로 받아들이게 된 변화의 순간.
결과를 들은 날,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앉아 있었다
검사 결과를 듣는 날, 나는 병원 대기실 한쪽에 앉아 있었다.
의자를 등지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고, 접수 창구 쪽에서는 간간이 이름이 불렸다. 호출 소리는 생각보다 또렷했고,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대기실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소독약과 공기가 섞인, 익숙하지만 반갑지는 않은 냄새였다.

겉으로 보이는 환경만 놓고 보면, 이 장면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 예전과 같은 자리에, 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병원, 같은 대기실, 같은 검사 흐름. 모든 것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느껴보니,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상태라는 게 또렷하게 전해졌다. 몸의 긴장도, 마음의 움직임도 예전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 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시간은 늘어지고 생각은 끝없이 증폭되었다. 의사의 문 한 마디, 결과지에 적힌 단어 하나가 내 하루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한동안을 전부 결정해 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결과를 듣기도 전에 이미 수많은 상황을 상상했고, 그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여러 번 흔들어 놓았다.
그때의 나는 결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최악을 미리 살아내고 있었다.
아직 아무 말도 듣지 않았는데도, 마음은 이미 결론을 내려 버렸고, 그 결론에 맞춰 감정을 소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를 듣는 순간에는 이미 지쳐 있었고, 어떤 말을 들어도 마음이 버텨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결과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날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나는, 스스로도 조금 낯설 만큼 조용했다.
긴장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이름이 불릴 때마다 몸이 반응하는 것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 긴장은 마음 전체를 장악하지는 않았다. 생각은 한 방향으로 폭주하지 않았고, 감정 역시 일정 선을 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마음 한쪽에 분명한 인식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 사실이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까지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인식이었다. 그동안 이어온 생활, 반복해 온 선택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쌓여 있던 과정들은 결과 한 장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감각이 바닥처럼 깔려 있었다.
그 인식은 나를 강하게 만들거나 스스로를 방어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장된 기대나 두려움을 내려놓게 해 주었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니, 그 결과 앞에서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단단한 바닥이 생긴 느낌이었다. 나는 그 위에 앉아 있었고, 그래서 불안이 있어도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의사 앞에 앉아 결과를 들을 때도, 내 반응은 스스로도 낯설 만큼 차분했다.
결과지 속 표현들이 하나씩 설명될 때마다, 나는 그 말을 따라가고 있었다. 예전처럼 숨이 가빠지거나, 설명의 앞부분을 놓쳐버리는 일은 없었다. 어떤 단어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멈칫했고, 귀에 더 크게 꽂히는 표현도 분명히 있었다. 완전히 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나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
놀람이나 긴장이 올라왔다가도, 곧바로 가라앉는 흐름이 느껴졌다. 결과를 듣는 동시에, 나는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을 함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결과에만 매달렸다면, 그날의 나는 결과와 나 사이의 거리를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 거리 덕분에, 나는 결과를 ‘판정’이 아니라 ‘정보’로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나에게는 매우 결정적인 차이였다.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조차 나는 이미 예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앉아 있었다.
결과가 전해지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한 가지 감각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 나는 지금 이 말을 판단으로 듣고 있지 않구나.’
그 인식은 갑작스럽게 떠오른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설명을 듣는 내내 조용히 이어지고 있던 느낌에 가까웠다.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들어왔지만, 그 말들이 곧바로 내 감정을 끌고 가지는 않았다. 나는 결과를 듣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결과와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결과를 듣는 순간, 자동으로 평가부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말이 나오면 안도했고, 그렇지 않다는 표현이 들리면 마음이 곧바로 가라앉았다. 좋아졌다, 나빠졌다, 성공이다, 실패다 같은 이분법적인 해석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되곤 했다. 그 판단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다른 방식으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흐름이 달랐다.
결과는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 내 몸의 현재 상태를 설명해 주는 정보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위와 식도는 어떤 상태인지, 어떤 부분은 유지되고 있고, 어떤 부분은 더 관리가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에 가까웠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결과가 평가가 아니라 정보가 되자, 감정의 움직임도 훨씬 완만해졌다.
의사의 설명이 끝났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결과지보다 내 반응을 먼저 돌아보게 되었다.
결과가 기대만큼 좋았는지, 아니면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지보다도,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예전처럼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먼저 느껴졌다.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마음이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지 않았고, 결과가 끝나자마자 ‘그래서 이제 뭘 더 해야 하지’라는 조급한 질문이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그 대신 비교적 차분한 생각이 이어졌다.
지금 상태를 알고, 필요한 부분을 이해했고, 그에 맞게 생활을 이어가면 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조차, 나는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 감각은 예전의 나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병원을 나서며 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결과가 나를 정의하지는 못하네.’
이 생각은 결과를 가볍게 여기겠다는 선언이나, 모든 것이 괜찮다는 자기 위로는 아니었다. 결과는 여전히 중요했고, 앞으로의 생활에서도 참고해야 할 기준임에는 분명했다. 다만 그 결과가 내 모든 선택과 감정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결과는 내가 관리해야 할 대상이지, 나를 평가하거나 판결하는 문장은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해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나는 결과를 계속 곱씹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바로 검색창을 열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고, 수치를 하나하나 비교하며 스스로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다. 결과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설명은 이미 들었고, 지금 당장 더 파고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감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아주 일상적인 선택들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물을 한 잔 마시고, 몸 상태를 한 번 느껴보고, 평소처럼 식사를 준비했다. 결과를 들은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축하할 이유도, 반대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 이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의 저녁은 그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저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나에게는 가장 큰 변화처럼 느껴졌다.
결과를 들은 날조차도 일상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 결과가 하루의 흐름을 뒤흔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전의 나와는 분명히 다른 지점에 와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변화는 결과지 위에 쓰여 있지 않았지만, 그날의 선택과 반응 속에 이미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앉아 기록을 하면서 나는 이전의 재검진 기록들과 지금의 기록을 나란히 놓고 다시 읽어 보았다. 같은 주제, 같은 검사,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글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예전 기록 속의 나는 결과에 매달려 있었고, 문장마다 감정의 흔들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결과에 대한 해석과 추측,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다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불안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반면 이번 기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결과가 어땠는지를 길게 적기보다는, 그 결과를 들은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긴장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는 점, 설명을 들으면서도 호흡이 급해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병원을 나선 이후에도 하루의 리듬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들이 차분하게 적혀 있었다. 기록 속의 문장들은 감정을 토해내기보다는, 상태를 관찰하고 정리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 기록들을 비교해 보면서 나는 한 가지를 아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변화는 결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반응으로는 이미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수치가 어떻게 나왔는지, 의사의 설명이 어떤 표현을 사용했는지보다도, 그 순간의 내가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변화처럼 느껴졌다.
예전의 나는 결과가 좋아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말이 들리면 그제야 숨을 돌렸고, 기대에 못 미치는 표현이 나오면 마음 전체가 금세 가라앉았다. 결과는 언제나 내 감정의 출발점이었고, 하루의 분위기와 이후의 선택들까지 좌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결과가 어떻든, 그 결과를 삶 전체로 확대하지 않았다. 결과는 결과로 남겨두고, 그 바깥에 있는 나의 생활과 태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 차이는 수치로는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체감으로는 매우 컸다.
결과에 따라 나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감각, 그리고 결과가 나의 가치를 정의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이전의 나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나는 그 차이가 단순한 마음가짐의 변화가 아니라, 실제로 생활 속에서 축적된 변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글은 재검진 결과를 들은 날의 기록이다.
결과 자체를 정리하거나 분석하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결과 앞에서의 나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남기기 위한 기록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관리해야 할 몸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불안해지는 순간이나 흔들리는 시기는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결과 하나로 무너지는 사람은 아니다. 결과는 여전히 중요하고 참고해야 할 자료이지만, 나를 평가하거나 규정하는 기준은 아니었다. 결과는 내 앞에 놓인 정보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내 생활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 결과 이후, 내가 생활 속에서 무엇을 굳이 바꾸지 않았는지에 대해 기록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바꾸지 않았다는 선택이 왜 오히려 더 중요하게 느껴졌는지, 변화가 추가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단단해졌다고 느낀 이유를 솔직하게 풀어보고 싶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지금도 그 흐름 안에서 천천히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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